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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술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구호하려는 필요에서 자기 경험으로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찾는 데서 시작되어 자신에게서만 그치지 않고 항상 이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연구/발전해 왔다. 이것이 원시의술(原始醫術)이 태어나게 되는 배경이다. 원시인은 인체의 건강 질병 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현상이 신령(神靈), 악마(惡魔) 등 신비력(神秘力)에 의해 일어나고, 치유된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많은 주술(呪術)이 생겨나고 이것들이 변하여 민간의술(民間醫術)과 민속학(民俗學)이란 종이의 앞 뒤 장 같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두 개의 분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미신적(迷信的)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민간의학(民間醫學)은 그 민족의 원시심리(原始心理), 특히 그 신앙 및 민속 가운데 침전되어 군데군데 남아있는 병마양퇴(病魔 禳退)에 관한 미신적 방법을 주의 깊게 분석함으로써 그 민족 나름의 민간의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주술적(呪術的) 권능으로 행해지고 있는 '무당', 즉 'Medicine man'의 '마지', '굿', '풀이' 등에서 이것이 고증된다. 지역적으로 중국대륙과 인접한 우리나라는 대륙 중심의 한(漢)문화의 영향을 꾸준히 받아 왔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의술도 전해지고 특히 불교의 발상지 인도(印度)의 의술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원시시대에서 고조선(古朝鮮)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고유의 의술이 자생적으로 발전해 왔었다. 한(漢)나라가 우리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하면서 우리 고유의 의술과 대륙의 우수한 의술이 직접적으로 교류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반도의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백제(百濟)는 다시 일본(日本)으로 문화와 함께 의술도 전파시켜 일본 의술의 발전을 가져다주어 한때는 백제인이 일본 의술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우리 의술은 지리적, 정치적 영향 못지 않게 대륙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불로장생(不老長 生)의 도교사상(道敎思想), 선가사상(仙家思想)의 연금술(鍊金術) 및 방중술(房中術)까지 포용하게 되었다. 특히 한방(韓方)의학의 논리 구성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음양(陰陽) 및 금/ 목/ 수/ 화/ 토(金/木/水/火/土)의 오행(五行) 이론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수입된 인도 의술의 기초 이론인 지/수/화/풍(地/水/和/風)의 4원소론에 의해 많은 혼란마저 겪은 감이 있다.


인류는 원시상태에서는 외부로부터 받은 상처에 본능적으로 타액(唾液)을 바른다든지 또는 무마(撫摩)하여 그 통증을 제거하는 등으로 대처했다. 체내에서 통증이 일 때에는 가까운 데서 얻을 수 있는 약초를 먹어 장내의 불순물을 구토 또는 설사함으로써 배설하는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다. 근본적으로 원시시대에는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신령(神靈), 악마(惡魔) 등 기타 외부적 초자연력(超自然力)에서 오는 것으로 믿어졌다. 특히 질병은 정령(精靈,spirit), 악마(demon)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혹은 잠시 이들이 체내에 들어와 생기는 현상이라 생각하여, 무술적(巫術的) 방법 등 미신적인 행위로써 이를 제거하면 즉시 쾌유되리라 믿었었다.

이는 현존하는 무격민속(巫覡民俗)에서도 그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주적(巫呪的) 퇴치 의술은 원시시대에 있어서 신앙으로 변하여 신(神)을 숭배하는 신앙사상과 악정(惡精)을 따르는 샤만적 술법으로 뒤섞여 발전해 왔다. 신앙사상은 자신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신에게 기도하여 도움을 받으려는 쪽으로, 샤만적 술법은 오로지 악정을 구축하기 위하여 마술(魔術)을 행사함으로써 자기 안위를 얻고자 하는 쪽으로 발전 되었다.샤만(Shaman)의 직능은 첫째로 사제(司祭, Priest), 두 번째로 의무(醫巫,Medicine man), 세 번째로 예언자(豫言者,Prophet)로서의 직분과 역할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사제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의무는 병자에게서 악정을 제거하여 병을 났게 하며, 예언자는 점(占)으로서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는 직능을 각기 갖는다.

원시사회 또는 고대사회에서는 의사, 승려, 무술자의 직업적 구분은 있을 수가 없었고, 바로 샤만이야말로 이들 세가지 직능을 한 손에 넣고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한 존재였다. 우리의 시조의 호칭 '단군(檀君)'은 무당의 뜻을 가진 '당골'이란 호칭의 음을 따서 적은 것이다. 이는 군주로서만이 아니라 샤만직까지 행사하는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을 함께 갖 춘 군사(君師)라고 이해된다. 원시 또는 고대사회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절대 군주로서 의 '단군'의 직능이 쉽게 파악된다. <삼국유사>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태백산맥 신단수 밑에 내리시어 신시(神市)를 세우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명(命), 병(病) 등 오사(五事)를 행하여 사람에게 三白六十여사를 맡아서 인간 세상을 가르치고 다스리셨다"고 적고 있다. 우리의 의술은 환웅을 시조로 하여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시대부터 인접한 중국의 의학적 지식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우리 의학은 문헌적으로는 삼국시대인 고구려 평원왕 3년(AD562)년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내외전>(內外典) <약서>(藥書),<명당도>(明堂圖)등 164권의 의서를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에 귀화하였다는 기록이 효시가 된다. 이어서 불교의 전래는 의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보살내지 신중(神衆)의 힘을 빌어 질병을 없애고자 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불교를 믿음으로써 질병의 발생과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게되어 승려는 자연히 의술을 겸하여 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승의(僧醫)의 의술은 단순한 종교적 신앙, 즉 신비적인 의학의 방법은 아니고 당시 중국의 발달한 의술에 영향을 받은 우수한 승의들이 대거 참여한 결과였다. 중국 남조(南朝)시대의 한방술이 불전(佛典)과 함께 전해질 때 그 가운데 인도의 의설(醫說)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인도의술도 간접적으로 삼국에 전해졌고, 적으나마 아라비아 의술도 유입된 흔적이 엿보인다. 인도 승려들은 반드시 의술을 연마 시행해야 하는 의방명(醫方明)이 오명(五明)의 하나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승려는 의술에 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도의설은 내인(內因)에 의한 지수화풍의 병리설과 풍(風)열(熱)염의 요소로 된 생리설이 불전과 함께 중국을 통해 삼국시대에 우리에게도 수입이 되었다.

고구려 시대 의술은 중기 이후에 무주적 방법을 사용하는 이외에 의술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 생겨 의술이 차차 원시 형태의 무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 발전을 보아 전문화해 갔다. 이보다 후에 발전한 백제는 서해를 통한 중국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로 우수한 대륙의 의술을 수입 발전시켜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이라는 저서로 특유의 독자적 발전을 이루고 우수한 승의가 배출되어 일본 의학을 지도 육성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백제에서는 의(醫)와 약(藥)의 분업화를 이루어 백제 성왕32년(AD554년)에 백제의 의박사 내졸(奈卒) 왕유능타(王有陵陀)와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반량풍과 고덕(固德) 정 유타(丁有陀)가 일본의 청에 따라 건너간 사실로 미루어 의/약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동남에 치우쳐 외래문화와의 접촉이 활발하지 못하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고조선 시대의 무술적 방법과 민간적 경험치료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삼국시대 의학은 고조선 시대 의술을 바탕으로 지키면서 인접한 중국의학을 수입 결합하고, 여기에 다시 인도 의설을 가미해서 삼국시대 중기(中期)이후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의술 발전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 의술은 크게 발전했다.

중국 한대(漢代)의 의학 경전의 고전인 <소문(素問)>은 '권4 이법방의론(券四 異法方宜論)'에서 "동방 지역은 그 병이 모두 등창과 종기로 이를 났게 하려면 폄석을 썼다(마땅하여). 이 폄석의 효험이 좋아 중국의 폄석도 모두 동 방에서 온 것이다"라 적고 있다. 우리의 고대 사회에서는 침술이 발전해 외과적인 치료까지 했었다. 실제로 1929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석기 시대 생활 주거지에서 석침(石針)과 골침(骨針)이 함께 출토되어 이런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외래문화와 차단되어 뒤떨어졌던 신라는 통일을 이룩하면서 당(唐)의 학술/ 문화 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유학생을 당으로 파견했다. 이어 문물제도도 당의 제도를 채택하여 효소왕 원년(AD 692년)에는 처음으로 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두고 박사(博士) 2인으로 하여금 학생에게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침경(針經)> 등을 가르치도록 함으 로써 의학교육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외에도 약전(藥典, 保命司)이 있어 의료행정을 담당하는 대표기구로 사지(舍智) 2인, 사 (史) 6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고 직접 의료에 종사한 공봉의사(供奉醫師)와 왕실의 질병을 진료하던 시의(侍醫), 내공봉의사(內供奉醫師)의 제도를 두었다.

의서에서는 일본의 <의심방>에 신라법서방, 신라법사비밀방 등이 인용되었으며, 또한 당시 신라의 승의(僧醫) 법사류관(法師流觀), 승(僧) 충담(忠談), 대증(大證), 훈겸(訓謙) 등이 당에 유학하는가 하면, 당에서는 태의서령(太醫署令) 육원경(陸元景) 등이 신라에 파견되어 양국간에 의학의 교류가 활발했었다.


고려의학은 초기의 당/송(唐/宋)의학을 기초로 서남지역에서 수입된 인도의학과 멀리 아라비아 의학의 지식 등이 종합되어 독자적인 의학의 틀을 잡았다. 그리하여 사색(思索)을 주로 한 이론의 정립에 역점을 둔 의경(醫經)의 지식보다는, 임상적(臨床的) 실제 의학인 치료의방서(治療醫方書)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시대 의료기관은 중앙과 지방으로 크게 나뉘어 실시되었다. 중앙에서는 의사행정을 총괄하는 대의감(大醫監)이 있고 한림원(翰林院)에 의관(醫官)이 따로 있다.

서민구제 및 의료사업은 제위보(濟危寶),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 등에 의원(醫員)이 전속되어 치료를 전담했었으며 병제(兵制) 중에도 약원(藥員)을 두고 전옥서(典獄暑)에도 의원을 두어 수인을 진료하도록 했다. 궁중에도 어약(御藥)을 담당한 상약국(尙藥局)과 어찬(御餐)을 받드는 사선서(司膳暑)에 식의(食醫)가 전속되어 있었고, 동궁관(東宮官)에는 약장랑(藥藏郞)과 약장승(藥藏丞)이 따로 배속되어 있었다. 지방으로는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의학원(醫學院)에 분사대의감(分司大醫監), 판감, 지감 을 두고 따로 약점을 두었고, 동경 및 남경 유수관을 비롯하여 대/중 도호부, 방어진(防禦 陣), 각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 약점을 두어 이곳에 와서 의사와 의생 등을 두었다. 의학교육은 중앙과 서경에 의학원을 두고, 12목(牧)과 3경(京) 10도(道)에 의학박사를 두어 의학을 배우게 하였고 공양왕 원년(AD1389년)에는 의학이 10학 중의 하나로 전의시에 속하기도 했다. 광종 10년(AD959년)에는 제업, 명경이 다른 제업과 함께 실시되어 의과 고시에 여러 번의 급제를 보았다.

의서에 있어서도 중국 의서의 고려 복간본(復刊本)과 고유의 간본(刊本)이 있어 독자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등 많은 의서의 출간을 보았으나 아깝게도 <향약구급방>을 제외한 나머지 의서는 전부 전하지 않는다. 의인(醫人)에 있어서도 명의를 많이 배출하여 이상로(李尙老), 설경성(薛景成), 김영석(金 永錫), 곽여(郭輿), 이단지(李但之) 등이 의료활동과 함께 의학저술에 힘썼다.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의사제도를 답습하면서 명칭과 의원 수에 있어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 태조 때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30권을 편찬시켜 정종 원년(AD1398년)에 그 정립을 보게 된다. 특히 태종 때 제생원(濟生院)에 의녀(醫女)제도를 설치하여 창고궁사(倉庫宮司)의 소속비(所屬婢)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脈經)과 침구(針灸)를 학습시켜 부인들을 주로 치료케 했다. 연산군 이후에는 진료에 종사하는 이외에 화장을 시켜 관기와 함께 연회에 참석 시켜 의인(醫人)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천시받게까지 되었다. 이는 의녀의 선발과정에서 노비출신의 동녀를 뽑기 때문에 중서(中庶)계급의 여인들이 의녀가 되기를 기피 한데 연유한다.

외국과의 의약관계는 태종 때 양녕대군이 사절로 명(明)에 갔을 때 판전의사(判典醫事) 양홍달(楊弘達)이 수행하였고, 태종 때 성석린(成石隣)이 명에 가서 의사를 청했으며 약재도 무역하게 했다. 태종 5년(AD1405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따라온 정승(鄭昇)과 김보(金甫)가 송묘(松苗)를 얻고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일본의 승의 평원매(平原梅)의 귀화, 타이(샴)의 소목(蘇木), 속향(束香)의 헌납 등 남방과의 교역도 활발해짐에 따라, 남방약재가 유구(琉球)의 중계무역으로 활발히 수입되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향약(鄕藥)의 중요성에 착안해 각 도에서 향약을 채취하여 당나라의 약과 약효를 비교/검토함은 물론 투약의 방법까지 실험하여 향약 중에 당나라 약과 같은 약효가 있을 때는 즉시 이를 대체 사용하도록 했다.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간행하여 시기(月), 때(時)를 적절히 하여 약효의 일실(逸失)을 막게 하였고, 이어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을 편찬 간행하여 새로운 약재를 추가함으로써 당나라 약을 대체 사용하도록 했다. 세종 27년(AD1445년)에는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 간행하여 우리나라에 전해 오던 의방을 모두 한데 모아 집대성했다. 원(元)의 <무원록(無寃錄)>을 사용함으로써, 옥에 갇힌 백성들의 질병 등에도 고루 의료 혜택이 돌아가도록 법적으로 배려했다.

의사제도에 있어서도 습독청을 설치해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15명을 두어 의서를 습독하도록 권장했다. 의과(醫科)를 침구의(針灸醫), 내력의, 치종의(治腫醫) 등으로 나누어 전문적 치료를 하도록 했으며 물리요법을 응용하여 온천욕, 냉천욕, 한증욕, 약욕 등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신응경(神鷹經)>, <주부축진방>, <구급역방(救急易方)> 등의 의서를 편찬하고, 중종때에는 한글로 풀어 쓴 언해본(諺解本) 의서가 많이 역간되었다. 세조 때의 <구급방언해> 등이 출간 응용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벽온방(壁瘟方)>, <창진방(瘡疹方)>, <의방유취(醫方類聚)>, <속벽온방(續壁瘟方)> 등이 간행되었다. 선조 때에 와서는 치종청(治腫廳)을 두어 왜란 등 전쟁으로 인한 질병, 부상의 치종청을 두어 왜란 등 전쟁으로 인한 질병/부상의 외과의적인 치료에 임하게 하였으며, 정유재란 무렵에는 시체부검과 해부를 통한 실증적 연구로 서양의학과 일맥상통하는 면도 보였다. 이 무렵 안경이 처음으로 수입되어 노인들이 쓰기 시작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담배 흡연도 성행하게 되었다. 선조 29년(AD1596년)에는 태의(太醫) 허준(許浚)에게 명하여 유명한 <동의보감>의 편찬 에 착수하도록 해, 광해군 2년(AD1610년)에 와서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 鑑)>은 총 25권 25책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실제 간행본은 광해군 5년 11월에 처음으로 완간된 것이다.

종래부터 전해오던 두과(痘科)의 발달은 차차 경험을 중심으로 발달해 <두창경험방(痘瘡 經驗方)>, <용산요두편(龍山療痘篇)> 등의 전문 서적과 숙종 때 두과 전문의 유상(柳 ), 치종술(治腫術)의 신의(神醫)라 불리우는 백광현(白光炫) 등을 배출했다. 영조 때에 와서는 서양 의서의 교류도 있어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設)>에 서양 의학이 소개되었으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종두기법(種痘奇法)>, 최한기(崔漢綺)의 <서의한역서(西醫漢譯書)> 등이 나왔다. 천주교의 선교, 의료사업 등으로 서양의학이 국내에 들어왔으나 서학에 대한 탄압으로 서양의학의 신지식은 실제로 이용되지는 못하고 일부 학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따름이다.
조선조 후기에 와서는 직제도 많이 변하여 의약(議藥), 산실청(産室廳), 전의감(典醫監), 제생원(濟生院), 혜민국(惠民局) 등이 변천 운영되었다. 의과(醫科) 요원의 선발(取材)도 건국 이후 계속 엄격한 기준을 정해 실시되었다. 의술은 악질(惡疾)의 예방, 접종, 치료구호 등 분업화에 힘입어 사회 깊숙이 스며들면서 전문화를 보게 되었다. 양반계급에서도 생업으로 삼지는 않으면서 의료행위를 하는 유의(儒 醫)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운양호사건 이후 일본인들은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부산에 제생원(濟生院)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세워 이 무렵부터 서양의술이 공공연하게 실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한방의학(韓方醫學)은 100여 년간의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공공기관 및 교육 기관에서는 서양의학을 주로하는 교육과 의료행위가 한방의학보다도 일반화되었다. 지석영(池錫永)이 우두종법(牛痘種法)에 의한 서양의술을 직접 시술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의료 기관인 내부병원(內部病院), 제중원(濟衆院), 대한의원(大韓醫院), 광제원(廣濟院) 등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곧이어 서양 선교사에 의한 현대식 서양병원과 의학교가 세워지면서 서양식 의료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한방의학(韓方醫學)의 명맥은 이제마(李濟馬), 이규준(李圭晙), 황도연(黃道淵) 등 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으나, 조선조 말부터 위축의 길을 걸어와, 이제서야 새로운 조명을 받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한방(韓方) 의학의 발전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재발견 정립하는 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